평론_목림상 전_박영택, 2019

김명숙의 ‘새벽 숲’_목림상 전(2019.11)

김명숙은 나무가 있는 숲과 커다란 사람의 얼굴을 그린다. 크고 가득하다. 이른바 생명이 있는 것들, 혼을 지니고 있는 것들의 신비로운 표정을 담아내려는 것이다. 경질의 재료들인 파스텔, 크레파스, 목탄을 종이위에 긋고 칠하는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자신과 재료를 부단히 하나로 일치시키는데 이는 마치 영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의 세계를 향해 온 몸을 들이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림을 받아주는 종이의 두께는 턱없이 얇다. 그래서 다만 그 피부, 종이의 표면에 들러붙어 절망하듯 부딪치고 흩어진다.

작가의 화면은 세계, 혹은 운명과 독대하고 있는 단독자의 내면공간이며 그이가 그리고 있는 인간과 숲은 존재 고유의 힘을 환기 시켜주면서 정신과 영혼의 지고한 상태를 꿈꾸는 존재이자 떠도는 영적인 힘을 잡아내고 그것과 호흡하려는 순간의 표정으로 혼곤하다.

화면은 수사와 장식을 피하고 있고 색채는 모노톤에 가깝게 제한되어 있다. 화면에 무게를 주며 단정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효과는 그림의 일부분에 집중광선을 사용하는 데서 고조된다. 화면 전체를 통제하기도 하고 낱낱의 작은 것들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화면은 긴장감과 신비함을 동시에 획득하게 된다. 어둡고 습하며 깊고 모호해 보이는 그림들은 멀어져간 것들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면서 동시에 운명의 비극적인 빛깔과 눅눅한 냄새 같은 것을 가득 풍긴다.

얼굴을 그린 자신의 그림에 관해서 작가는 그 인물들이 “세계를 호흡하는 사람들”이며 “떠도는 영적인 힘과 정신을 부단히 잡아채려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무엇을 그리려는지 알 듯도 하다. 저 서늘한 새벽 숲을 그린 그림 역시 자연의 모든 것들이 우주와 함께 호흡하면서 비밀스럽게 제 몸을 여는 신비로운 순간을 형상화한 것이리라.

작가는 새벽 시간에 숲에 찾아가 오랜 시간 앉아서 수목들이 짙고 깊었던 어둠과 잠에서 깨어나 뒤척이는 그 순간을 함께하며 그네들의 숨결과 체취를 느꼈다고 한다. 어두움과 밝음이 공존하고 음과 양이 서로 길항하며 죽음과 삶이 함께 하는 새벽 숲에서 햇살들에 의해 비로소 조금씩 몸을 드러내는 숲을 목도한 체험은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경이로움과 충격이었던 것이다.

숲은 어떤 미지의 세계이자 영적인 세계의 원형이며 아울러 모든 생명의 근원, 거대한 자궁이자 도저히 가늠하고 측량할 길 없는 숭고함과 두려움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는 작가의 인식이 이 같은 숲을 그리게 했다. 그러니까 작가는 보이는 숲 자체를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껴나 있다. 오히려 작가는 숲을 매개로 해서 본인이 접한 숲에 대한 정신적 체험, 영적인 느낌과 수많은 단상들을 온전하게 그림으로 가시화하고자 한다.

그림 속의 숲은 나무의 정령들이 살아 호흡하고 있으며 서로 교감하는 일종의 신성림이다. 이 숲 안에서는 소리와 색들과 냄새들이 끊임없이 서로 상응하고 있다. 나무들은 또한 신성한 숲을 받치는 신전들의 기둥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연을 넘어서서 초자연을 지향하고 있다.

그 숲은 분명 현실에 존재하는 숲이지만 자잘한 선들의 집적과 어둠과 빛으로 인해 나누어진, 깊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비현실의 숲이기도 하고 작가만의 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사람의 흔적이 배제되고 오로지 울창한 수목과 숲을 둘러싼 기묘한 기운과 비릿한 내음만이 자리한 그런 풍경이다. 이처럼 두려움과 숭고함을 은연중에 부추겨주는 숲의 육체는 타자의 몸이다. 우리들의 육체(특히 남성의 육체)와 너무 먼 그 숲은 경이로우며 모호한, 측정하기 어려운 판독 불가능한, 난해한 모습이다. 동시에 숲은 거대한 생태계의 축소판 같기도 하다. 생태계는 모든 종류의 생명을 포용하고 이를 품고 길러내며 차별하지 않는다.

작가의 이 숲 풍경은 자연주의적인 그림이나 사실주의에 가 닿지 않고 미끄러지면서 일종의 생태적 세계관을, 여성만의 육체적 감각과 시선으로 잉태된 자연을 가시화한다. 나는 문득 그녀의 그림이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시선을 배제시키고 신이 지배하는 목적론적시간의 개념에서 벗어나 자신의 신체를 더듬어 가면서 숲 그 자체가 되고자 하는 그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의 육체가 실은 그 같은 숲이 아니겠는가라는 인식이 그림의 표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여성의 육체와 자연(숲)을 일치시키려는 부단한 시도는 아마도 그녀가 꿈꾸는 현실을 만나고 세계를 재현하려는 작가만의 방식일 것이다.

치열하게 그려진 화면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되었다. 얇디얇은 종이의 표면, 너무나 예민한 거죽은 어둠과 빛으로 둘러쳐진 세상의 끝처럼 깊고 아득하게 펼쳐져있다. 세상의 자궁 같은 눅눅하고 무한한 그 곳으로 우리들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마력은 충격처럼 혹은 전율처럼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그것은 여성의 몸과도 같이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음이고, 어둠과 신비를 간직한 생명의 산실이기도 하다. 파열음으로 갈라지고 쪼개지며 날카롭게 부서지는 저 빛, 선들은 그 어둠과 심연에 구멍을 내준다. 보는 이들은 그 빛에 의해 의식 저편으로 나간다.

모든 그림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의식 너머의 것을 물질화해서 보여줘야 한다는 아이러니와 딜레마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있다. 김명숙은 그림을 매개로 해서 보는 이의 시선과 마음을 의식 너머로 부단히 이끌고 있다. 그녀의 그림은 그렇게 어디론가 이 세상이 아닌 곳으로 보는 이들을 침잠시킨다. 스스로를 매질하며 먼 대양을 건너는 물새들의 자학적인 몸짓을 연상시키는 그녀의 태도는 육체적인 혹사와 그 혹사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화면을 통해 처절한 상처로 드러난다. 작가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분명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그림은 어떤 깊음을 갈망한다. 미친 듯이 몸부림쳐보지만 인간의 육체로는 바닥에 닿지 못하고 가늠할 수 없는 모종의 깊은 세계를 표현하려는 잔인한 상처들이 그림을 과밀도로 채우고 있다.

작가는 그림으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깊음의 세계’를 얇은 종이의 표면 위에 새긴다. 그것은 사실 불가능한 욕망이다. 그러나 작가는 온 힘을 다해 화면에 부딪쳐본다. 육체와 감각으로 문질러진 화면은 피와 상처, 고독, 절망, 날선 신경들로 참담하다. 그리고 그 장엄한 절망을 보여준다. 그것이 정작 그림이 되었다. 한 가닥 선은 그대로 자신의 육체와 감성의 혈관들이 되어 얹혀있다. 이 촉각적인 선들, 선들의 촉각화는 다분히 여성만의 감각이다. 여성들은 대개 시각보다는 촉각을 통해 세계와 만나고 느끼고 인식한다. 그것은 눈에 의존하는 남성의 망막중심주의로는 근접하거나 체험할 수 없는 여성만의 감각이라고도 한다. 이 그림은 여성만의 육체와 촉각으로 빚어낸 생태계이자 자연과 세계의 초상이다.

촉각적인 선, 육체화 된 수많은 선들은 도저히 재현할 수 없는,그러나 끝없이 자신을 괴롭히고 한시도 떠나지 않는 어떤 세계와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 오로지 그어질 뿐이다. 대상의 재현이나 외형의 윤곽을 가까스로 연상시키는 지점에서 멈춰선 선들은 화면 전체를 빼곡히 덮치면서 그 모든 선 하나하나를 되살린다. 이 비현실적인 선들에 의해 우리들은 작가의 정신을 날것으로 만난다. 그리고 존재의 고유한 힘 또한 만난다.

작가의 그림은 구상과 추상의 이분법적 구도를 슬쩍 비껴남으로써 어떤 범주에도 안주하지 않고, 그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를 획득한다. 그 자유가 온 몸의 진액을 쏟아 부어 그어낸 이 깊고 어둑하고 음습한 그림 속의 한 줄기 빛, 부서지며 산란하는 햇살, 물살 위에 어른거리는 빛이 되어 세상을 뚫고 어디론가 나아간다. 그림 안에 없는 세계, 그림 밖의 세계를 빛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숲을 바라보거나 물을 볼 때면 김명숙의 그림을 떠올린다. 그 순간 내 앞의 풍경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좋은 그림은 이렇게 현실을 비현실과 만나게 해주는 동시에 사물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상투적이고 습관적인 시선과 감각을 예리하게 비틀어준다. 그리고 나를 일깨워준다.

피륙을 짜듯이 촘촘히 그림을 그려나가는 작가의 태도와 삶, 화폭 안에다 자신의 삶의 진액을 쏟아 붓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엄격하게 자신을 칭칭 동여 메는 이 자기 치유적이며 다분히 자폐적인 그림그리기란 얼마나 허망하고 상처받기 쉬운 가. 민감한 감수성과 집중력으로 자기 자신을 소진시켜가면서 회화를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와 존재의 의미, 정신의 정점에 육박하고자 하는 이 행위는 어느 면에서는 고립무원일 것이다.

그러나 삶이 다른 무엇에 의해 충만 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에 의하여 충만 될 수밖에 없다면, 제 몸을 매질하여 또 다른 연안을 꿈꾸는, 다소 무모해 보이는 이 행위 또한 작가에게는 운명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림 속으로 더 깊이 밀어 넣으면 넣을수록 분명 두려움 또한 깊어지겠지만,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그이의 운명인 것을.

박영택

“기독교에서는 창조주가 인간을 가장 공들여 빚었다고 하지만 제 생각엔 수목이야말로 창조주의 역작인 것 같아요. 바람이 제 작업실 뒷산 수목들을 휘감는 소리…이제 곧 녹색 촛불들이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타오르는지 알려하지 않고 다만 하늘을 향한, 다만 심연을 향한 갈망으로 충만해하는 수목들의 신전을 이루겠지요.” (작가 노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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