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숙의 회화는 범신론적, 범미학적 주장으로 가득한 듯이 보인다. 범미학적이라 함은 자연과 우주내에 존재하는 만물의 고유법칙들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서 거기에서 공통되는 미학 관점을 추출하여 그것을 보편화, 추상화 시킴을 의미한다. 김명숙은 자연과 인간(자연 중 대표적이랄 수 있는)을 주로 다루는데, 그 자연과 그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의 모습과 흔적들에는 이러한 존재로서,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존재이고자 하는 주장 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명숙의 숲은 화면 가득히 올오버되어 있는데, 둥치는 강건하며, 세부는 풍부하고도 세밀하게 묘사되어 아름답게 빛난다.
이러한 숲은 신성림이다. 여기에는 나무의 정령들이 살아 호흡하고 있으며, 서로 교감한다. 이 숲 안에서는 소리와 색들과 냄새들이 끈임 없이 서로 상응하고 있다. 나무들은 이 신성한 숲을 바치는 신전의 기둥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연을 넘어서서 초자연을 지향하고자 하는 데, 즉 범신적 초자연으로서의 보편적 존재방식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화면은 이러한 작가와 작품을 지배하는 내밀한, 초월적인 내용에 합당한 형식으로 추구되고 있다.
화면은 수사와 장식을 피하고자 거의 모노톤에 가까웁게 색채가 제한되고 있다. 이것은 화면에 무게를 주며, 단정하고도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게 한다.
이러한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기 위해 작가가 풍요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광선의 효과이다. 그의 화면에는 스포트라이트(spotlight)적인 집중 광선이 즐겨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화면 전체를 하나로 통일해내는 한 개의 강력함이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개의 작은 것들로서 부분을 집중시키면서 전체를 올오버 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나머지 부분은 깊고도 어두운 단색조로 처리되고 있다. 따라서 집중광선을 받는 부분은 어두운 배경위로 신비롭고도 긴장되게 떠오른다. 그리고 화면 전체도 역시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신비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광선아래 작가가 소재로 사용하는 인물이나 자연물의 형태를 이루기 위해 수많은 선들이 사용되고 있다. 즉 수없이 중첩된 선들로서 형태가 이루어지고, 때로는 스크래치된 선들이 앞서 언급한 광선효과 아래 반사된 빛줄기와도 같이 분산되고 집합한다.
이 선들은 광선효과와 어우러져 김명숙 회화를 특징짓게 하는 중요한 조형 요소가 아닌가 한다. 수많은 중첩된 선과 스크래치에 의해 이루어진 형태는 견고한 조각적 모델링을 가지기 보다는 주관적 감성을 강조하고, 분위기 위주의 표현적 형태들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색점이나 색면, 외각선에 의지하기 보다는 선 자체의 운용과 그것의 표현성에 그의 화면은 많이 의거하며, 페인팅의 범주보다는 드로잉의 범주에 좀 더 접근하는 일면을 관찰할 수 있다.
화산은 조용히 휴식하고 있는 듯하지만, 때로는 파괴적이고 폭발적인 매우 커다란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 분화구는 우리가 내밀한 언어를 끄집어내기에 충분하고 풍부한 보고를 가진 듯 하고, 이 언어들을 삼키고 있는 존재,굳이 형태화한다면 아마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인, 인간을 충분히 감추어야 할 만한 장소이다. 즉 이것은 상상의 보고이고, 잠재된 힘의 보충에 대한 희망이다.
이 분화구는 단일 이미지로 화면 전면에 간략하고도 역시 스포트라이트적인 광선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통상적인 방법 즉 대상을 부각시키는 방법으로가 아니라 배경 면을 비추게 하여 대상이 역으로 어두웁고도 무겁게 드러나도록 하는 방법으로이다. 그리하여 전면에는 단색조의 어두움이 드리우며, 분화구에서 뒤로 갈수록 신비한 빛들이 유출되고 필회들이 살아 반사되게 하여,이른바 역대기원근법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이러한 효과는 인물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스냅사진처럼 잘리워진, 찰나적인 순간의 한 부분을 포착한 듯한 인물의 단면들로 매우 모뉴먼트하게 처리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긴장된 내밀한 언어들은 모두 존재의 힘에서 비롯된 것임을 작가는 환기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이 김명숙 회화의 세계이고 개성이며 표현영역인 것이다.
신방흔 1991 공간 전시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