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 전 (2013)
이 영정들은 작년 가을 내 작업실 돌담 밖을 서성이던 낯선 할머니로 인하여 시작하게 되었다.
지나가는 길에 여기 살던 친구가 생각나서 들렸노라고 하시기에 이 터를 내게 팔고 서울 아들네로 가신다던 할머니의 안부를 물으니 가신지 1년 만에 자살을 하셨다며 말끝을 흐리시는 것이었다. 며칠을 할머니 생각으로 가슴앓이를 하다가, 작업실 한 켠에 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인고의 세월이 아로새겨진 할머니의 얼굴이 아름다워 찍어 드렸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으로나마 이곳에 계시라고 붙여 두었던 사진들은 이미 빛이 바래져 있었다. 이곳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다 떠난 그 분을 그려드리는 것, 그것만이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진혼의 의식이었다. 그렇게 할머니의 영정을 그리면서, 오랜 세월 작업실 여기저기에 부적처럼 붙혀 두었던 사람들의 사진도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오래전 책에서, 신문에서, 길에서, 영화 속 화면에서 내 시선이 꽂혔던 그 얼굴들은 나에게 삶과 죽음의 비의를 전하기 위해 보내진 밀사들처럼 수 십 년 동안 한결같은 비장함으로 작업실의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가을숲에 귀 기울이고 있던 눈먼 소년, 나는 그 소년의 눈꺼풀 속 가을 숲을 그려보고 싶었다. 천 년 전 어느 고승이 불렀다는 못다 이룬 사랑노래를 부르며 내게로 걸어왔던 미친 여승, 나는 눈물 가득한 그녀의 눈망울에서 고승을 그리워하는 공주의 사무친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의 손에 뉘인 죽어가는 병자의 얼굴, 나는 아침 햇살이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을 보았다. 영화 Runaway Train에서 탈옥수역을 하는 존 보이트, 그는 젊은 동료를 살리기 위해 고장 난 기차를 탈선시켜 죽음을 향해 달리고 있다. 어느 날 아침 신문에서 마주친 아내 살해자로 체포된 광부, 그의 얼굴은 살해자의 얼굴이 아니라 수난자의 얼굴이었다. 이스라엘군에 의해 피살된 동생의 복수를 위해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기 직전의 팔레스타인 청년의 모습, 그 입가의 미소… 그들이 아니었으면 길을 잃었을 내 정신의 등불들, 돌아가시고 나서야 비로소 그 품에 안길 수 있었던 아버지, 쉰이 넘은 딸이 그리는 스무살 아버지…
그들의 얼굴에는 사는 동안 그들과 함께 했던 신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골고다의 언덕에 끌려가는 예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준 베로니카의 손수건에 새겨졌다는 예수의 얼굴처럼, 모든 사람의 얼굴은 신의 모습이 아로새겨진 베로니카의 손수건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