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숙의 회화는 범신론적, 범미학적 주장으로 가득한 듯이 보인다. 범미학적이라 함은 자연과 우주내에 존재하는 만물의 고유법칙들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서 거기에서 공통되는 미학 관점을 추출하여 그것을 보편화, 추상화 시킴을 의미한다. 김명숙은 자연과 인간(자연 중 대표적이랄 수 있는)을 주로 다루는데, 그 자연과 그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의 모습과 흔적들에는 이러한 존재로서,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존재이고자 하는 주장 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명숙의 숲은 화면 가득히 올오버되어 있는데, 둥치는 강건하며, 세부는 풍부하고도 세밀하게 묘사되어 아름답게 빛난다.
이러한 숲은 신성림이다. 여기에는 나무의 정령들이 살아 호흡하고 있으며, 서로 교감한다. 이 숲 안에서는 소리와 색들과 냄새들이 끈임 없이 서로 상응하고 있다. 나무들은 이 신성한 숲을 바치는 신전의 기둥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연을 넘어서서 초자연을 지향하고자 하는 데, 즉 범신적 초자연으로서의 보편적 존재방식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화면은 이러한 작가와 작품을 지배하는 내밀한, 초월적인 내용에 합당한 형식으로 추구되고 있다.
화면은 수사와 장식을 피하고자 거의 모노톤에 가까웁게 색채가 제한되고 있다. 이것은 화면에 무게를 주며, 단정하고도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게 한다.
이러한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기 위해 작가가 풍요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광선의 효과이다. 그의 화면에는 스포트라이트(spotlight)적인 집중 광선이 즐겨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화면 전체를 하나로 통일해내는 한 개의 강력함이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개의 작은 것들로서 부분을 집중시키면서 전체를 올오버 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나머지 부분은 깊고도 어두운 단색조로 처리되고 있다. 따라서 집중광선을 받는 부분은 어두운 배경위로 신비롭고도 긴장되게 떠오른다. 그리고 화면 전체도 역시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신비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광선아래 작가가 소재로 사용하는 인물이나 자연물의 형태를 이루기 위해 수많은 선들이 사용되고 있다. 즉 수없이 중첩된 선들로서 형태가 이루어지고, 때로는 스크래치된 선들이 앞서 언급한 광선효과 아래 반사된 빛줄기와도 같이 분산되고 집합한다.
이 선들은 광선효과와 어우러져 김명숙 회화를 특징짓게 하는 중요한 조형 요소가 아닌가 한다. 수많은 중첩된 선과 스크래치에 의해 이루어진 형태는 견고한 조각적 모델링을 가지기 보다는 주관적 감성을 강조하고, 분위기 위주의 표현적 형태들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색점이나 색면, 외각선에 의지하기 보다는 선 자체의 운용과 그것의 표현성에 그의 화면은 많이 의거하며, 페인팅의 범주보다는 드로잉의 범주에 좀 더 접근하는 일면을 관찰할 수 있다.
화산은 조용히 휴식하고 있는 듯하지만, 때로는 파괴적이고 폭발적인 매우 커다란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 분화구는 우리가 내밀한 언어를 끄집어내기에 충분하고 풍부한 보고를 가진 듯 하고, 이 언어들을 삼키고 있는 존재,굳이 형태화한다면 아마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인, 인간을 충분히 감추어야 할 만한 장소이다. 즉 이것은 상상의 보고이고, 잠재된 힘의 보충에 대한 희망이다.
이 분화구는 단일 이미지로 화면 전면에 간략하고도 역시 스포트라이트적인 광선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통상적인 방법 즉 대상을 부각시키는 방법으로가 아니라 배경 면을 비추게 하여 대상이 역으로 어두웁고도 무겁게 드러나도록 하는 방법으로이다. 그리하여 전면에는 단색조의 어두움이 드리우며, 분화구에서 뒤로 갈수록 신비한 빛들이 유출되고 필회들이 살아 반사되게 하여,이른바 역대기원근법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이러한 효과는 인물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스냅사진처럼 잘리워진, 찰나적인 순간의 한 부분을 포착한 듯한 인물의 단면들로 매우 모뉴먼트하게 처리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긴장된 내밀한 언어들은 모두 존재의 힘에서 비롯된 것임을 작가는 환기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이 김명숙 회화의 세계이고 개성이며 표현영역인 것이다.
현대미술은 장인적 숙련성이 지배하는 특별한 영역으로서의 회화가 갖는 역사적 지위에 대해 이미 이론적 논증을 마무리한 것으로 말해진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김명숙은 장 인적 기량과 예술만의 독점체계, 이를테면 진정성, 유일성, 정신성 등에 기초한 회화의 옛가치를 철저히 고수하려한다. 그리고 그 끈기와 무관심한 듯한 초연함은 이제는 죽어버렸지만 저 빛나는 신화를 되살리려는 영웅의 고통스러운 싸움임을 말해준다. 하긴 ‘새로움의 미학’이 선택받은 자들의 특별한 게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박판에서와 같은 광기가 거세게 지배해 온 현대미술의 발자취를 돌이켜 보면 우직스럽고 끈질긴 그 태도가 주목받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통산적인 관찰이나 구경의 대상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내면적 생활의 거울이자 대화의 상대자인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자연은 우리에게 아스라한 과거를 연상시킨다. 현대적 조건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저 근대에 대한 낭만주의적 태도가 그것이다.
그림의 전반적인 톤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어두운 가운데, 그 사이 간간히 베어든 빛의 효과는 일종의 종교적인 경외감을 느끼게 하며, 어두운 톤에 간간히 베어든 빛의 효과 역시 더할 나위 없이 신비스러운 뉘앙스와 분위기를 강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작가의 금욕적인 절제가 베어있어 언어의 의미효과를 초월한 듯이 보이게 한다. 절대적인 존재 앞에 선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태도와도 같은 저 신화의 한 장면이다. 거기에 거개의 작품들이 전시장 한 벽면을 가득 채우는 듯 장대한 스케일을 갖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재의 그 신비로운 나무 숲 혹은 그 숲의 실체인 절대적 힘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마저 준다. 그녀를 불러 세웠을 더 강력한 세계 속의 주권적 존재 앞에.
김명숙의 그림은 자기 자신의 체험방식에 깊이 몰입되어 있는 까닭에 외부세계에 패쇄적일 정도로 닫혀있다. 작품 외양에서의 어두운 톤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효과와 그 어두움과 빛의 효과가 일으키는 미묘한 깊이감은 그 정도를 헤아릴 수 없을만치 열려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 열림은 그녀 이외에, 다시 말해 스스로 체험했다고 하는 작가 외에는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은 폐쇄적인 열림이다.
이처럼 보는 사람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그녀의 물질문명에 대한 무관한 갈망을 느낄 수 있다.그런데도 작가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수공적인 작업이 주는 정성스러움을 다하고 있다.자연의 가장 미묘하고 연약한 부분들까지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자연에 대한 튼튼한 기초소묘력이 소중하고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대상에 대한 그녀의 감각을 객관화시키기 위해 애쓴 흔적들인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에게서 끊임없이 빠져나가려 하는 대상을 가시적으로 붙들기 위한 영웅적인 노력의 일환처럼 보인다.
이것은 불가능한 모험처럼 보인다. 그림의 표면은 장인적인 기질과 물질성이 가득 배어있지만, 실재 그림이 지시하는 것은 그 표면에 대해 너무나 초연하고자 한다. 광학적인 깊이의 환영을 통해 블랙홀적인 내면세계로의 공간이동을 시도하고 있다. 김명숙은 ‘새로움의 미학’이 숨가쁘게 앞만 내다보고 달린 결과 놓치고 만 소중한 것들의 생명력을 조금 더 보존하려하는 것일까? 회화의 죽음에 대한 선언보다 더욱 위축시키는 현실이 앞에 놓여있는 동시대의 문화조건은 회화의 존재론적 기반을 위협하는데 있어서 정점에 달한 듯싶다. 이론적으로는 ‘문화’라는 개념에 대해 사람들이 언급하기 시작했고 구체적인 일상에서 범람하는 ‘이미지’들이 있다. ‘가상현실’, ‘컴퓨토피아‘, ’인터액티브‘, ’인포아트‘, ’커뮤니케이션‘ 등 예술과는 이질적인 용어들이 어떤 식으로든 반영될 조짐은 가까이 광주비엔날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일이었다. 비록 그녀가 새로움의 미학이라는 게임을 비껴서기는 했지만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 할 것인가는 앞으로의 힘겨운 과제일 것이다. 이 싸움은 그 전의 싸움처럼 결코 쉽게 처리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패쇄적으로 지키려고 애쓸수록 옥쇄처럼 죄어들 것이다. 물론그렇게 죄어든 공간이 지금의 그 초월적인 세계일 수도 있지만.
김수기 1995, 가나아트 전시리뷰에서
Modern arts may have reached an end to its theoretical discussion over the historic status of paintings as an arena ruled by craftsmanship.
Standing at this end, Kim Myungsook firmly adheres to the mastery of painting, and to the distinguishing qualities of arts, such as integrity, singularity, and spirituality, which have underlied the tradition of painting. Her perseverance and indifference reminisce the struggles, heroic yet painful, to revive a long-dead myth of a glorious past. And it is of no surprise that such an attitude gains a renewed attention, especially in the contrasting face of modern arts, which, with rampant madness, gamble over the ‘aesthetics of novelty’ for those privileged to play such a game. Kim reflects upon nature, not as an object of sightseeing but rather as a mirror of and a channel to one’s inner life. In doing so, Kim’s paintings restore the romantic attitude towards modernity, which extends to the contemporary age.
While the overall tone of darkness evokes tension, the lights permeating therein elicit reverence, similar to that of a religion, as well as fortify the mystic nuance. The ascetic abstinence embedded in Kim’s paintings almost transcends the linguistic effect of meanings. We are brought to a mythical scene in which the incompleteness of human beings stand in front of the absolute being. This impression is maximized by the huge size of Kim’s paintings, filling the walls of an exhibition hall, where one cannot help but find oneself facing in a forest or the absolute force running underneath it—in front of the ruler that summoned Kim to her works.
Kim’s paintings are closed to the outside, as they are deeply immersed in the unique mode of the artist’s experience. Yet the openness of the unfathomable depth is conveyed through the effect of the darkness and light in the paintings. But again, such openness is a rather unapproachable one, to anyone without the direct experience of the artist.
In this way, we may come to appreciate, either consciously or not, the artist’s desire to remain aloof from material culture. Ironically however, Kim devotes painstaking handcraft to her paintings, as though to not let the most delicate and fragile bits of nature from perishing. Here, her solid skill in drawing are treasured and demonstrated in its fullness. The drawings reveal traces of the artist’s efforts to externalize her perception of objects. And these efforts appear to be those of a heroine who tries to grasp ever-escaping objects.
This may seem an impossible adventure. Although the surfaces of Kim’s paintings are filled with craftsmanship and materiality, what her paintings try to indicate is often too indifferent to its surfaces. Through such optical illusion of depth, the artist attempts to teleport to her black hole-like innerscape. Is she hoping to keep the little remaining lives of those lost during the relentless race of the ‘aesthetics of novelty’? The conditions of contemporary culture, which confronts a reality that is even more intimidating than the declaration of an end to paintings itself, have now reached the peak of their threats to the existence of paintings. ‘Culture’ has become a key theoretical concept while ‘images’ overflow in everyday life. Recent exhibitions such as the latest Gwangju Biennale already point to a new movement of blending arts with heterogeneous concepts such as ‘virtual reality,’ ‘computopia,’ ‘interactive,’ ‘communication.’ It awaits for Kim as a tough task to respond to the changing atmosphere of modern arts, even though she has sidestepped this game of the aesthetics of novelty. The artist’s struggle may not easily end this time as before. And it will constrain her even more as she insists on keeping her world closed – although the world may be a transcendental one as this one.
김명숙은 나무가 있는 숲과 커다란 사람의 얼굴을 그린다. 크고 가득하다. 이른바 생명이 있는 것들, 혼을 지니고 있는 것들의 신비로운 표정을 담아내려는 것이다. 경질의 재료들인 파스텔, 크레파스, 목탄을 종이위에 긋고 칠하는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자신과 재료를 부단히 하나로 일치시키는데 이는 마치 영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의 세계를 향해 온 몸을 들이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림을 받아주는 종이의 두께는 턱없이 얇다. 그래서 다만 그 피부, 종이의 표면에 들러붙어 절망하듯 부딪치고 흩어진다.
작가의 화면은 세계, 혹은 운명과 독대하고 있는 단독자의 내면공간이며 그이가 그리고 있는 인간과 숲은 존재 고유의 힘을 환기 시켜주면서 정신과 영혼의 지고한 상태를 꿈꾸는 존재이자 떠도는 영적인 힘을 잡아내고 그것과 호흡하려는 순간의 표정으로 혼곤하다.
화면은 수사와 장식을 피하고 있고 색채는 모노톤에 가깝게 제한되어 있다. 화면에 무게를 주며 단정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효과는 그림의 일부분에 집중광선을 사용하는 데서 고조된다. 화면 전체를 통제하기도 하고 낱낱의 작은 것들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화면은 긴장감과 신비함을 동시에 획득하게 된다. 어둡고 습하며 깊고 모호해 보이는 그림들은 멀어져간 것들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면서 동시에 운명의 비극적인 빛깔과 눅눅한 냄새 같은 것을 가득 풍긴다.
얼굴을 그린 자신의 그림에 관해서 작가는 그 인물들이 “세계를 호흡하는 사람들”이며 “떠도는 영적인 힘과 정신을 부단히 잡아채려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무엇을 그리려는지 알 듯도 하다. 저 서늘한 새벽 숲을 그린 그림 역시 자연의 모든 것들이 우주와 함께 호흡하면서 비밀스럽게 제 몸을 여는 신비로운 순간을 형상화한 것이리라.
작가는 새벽 시간에 숲에 찾아가 오랜 시간 앉아서 수목들이 짙고 깊었던 어둠과 잠에서 깨어나 뒤척이는 그 순간을 함께하며 그네들의 숨결과 체취를 느꼈다고 한다. 어두움과 밝음이 공존하고 음과 양이 서로 길항하며 죽음과 삶이 함께 하는 새벽 숲에서 햇살들에 의해 비로소 조금씩 몸을 드러내는 숲을 목도한 체험은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경이로움과 충격이었던 것이다.
숲은 어떤 미지의 세계이자 영적인 세계의 원형이며 아울러 모든 생명의 근원, 거대한 자궁이자 도저히 가늠하고 측량할 길 없는 숭고함과 두려움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는 작가의 인식이 이 같은 숲을 그리게 했다. 그러니까 작가는 보이는 숲 자체를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껴나 있다. 오히려 작가는 숲을 매개로 해서 본인이 접한 숲에 대한 정신적 체험, 영적인 느낌과 수많은 단상들을 온전하게 그림으로 가시화하고자 한다.
그림 속의 숲은 나무의 정령들이 살아 호흡하고 있으며 서로 교감하는 일종의 신성림이다. 이 숲 안에서는 소리와 색들과 냄새들이 끊임없이 서로 상응하고 있다. 나무들은 또한 신성한 숲을 받치는 신전들의 기둥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연을 넘어서서 초자연을 지향하고 있다.
그 숲은 분명 현실에 존재하는 숲이지만 자잘한 선들의 집적과 어둠과 빛으로 인해 나누어진, 깊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비현실의 숲이기도 하고 작가만의 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사람의 흔적이 배제되고 오로지 울창한 수목과 숲을 둘러싼 기묘한 기운과 비릿한 내음만이 자리한 그런 풍경이다. 이처럼 두려움과 숭고함을 은연중에 부추겨주는 숲의 육체는 타자의 몸이다. 우리들의 육체(특히 남성의 육체)와 너무 먼 그 숲은 경이로우며 모호한, 측정하기 어려운 판독 불가능한, 난해한 모습이다. 동시에 숲은 거대한 생태계의 축소판 같기도 하다. 생태계는 모든 종류의 생명을 포용하고 이를 품고 길러내며 차별하지 않는다.
작가의 이 숲 풍경은 자연주의적인 그림이나 사실주의에 가 닿지 않고 미끄러지면서 일종의 생태적 세계관을, 여성만의 육체적 감각과 시선으로 잉태된 자연을 가시화한다. 나는 문득 그녀의 그림이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시선을 배제시키고 신이 지배하는 목적론적시간의 개념에서 벗어나 자신의 신체를 더듬어 가면서 숲 그 자체가 되고자 하는 그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의 육체가 실은 그 같은 숲이 아니겠는가라는 인식이 그림의 표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여성의 육체와 자연(숲)을 일치시키려는 부단한 시도는 아마도 그녀가 꿈꾸는 현실을 만나고 세계를 재현하려는 작가만의 방식일 것이다.
치열하게 그려진 화면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되었다. 얇디얇은 종이의 표면, 너무나 예민한 거죽은 어둠과 빛으로 둘러쳐진 세상의 끝처럼 깊고 아득하게 펼쳐져있다. 세상의 자궁 같은 눅눅하고 무한한 그 곳으로 우리들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마력은 충격처럼 혹은 전율처럼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그것은 여성의 몸과도 같이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음이고, 어둠과 신비를 간직한 생명의 산실이기도 하다. 파열음으로 갈라지고 쪼개지며 날카롭게 부서지는 저 빛, 선들은 그 어둠과 심연에 구멍을 내준다. 보는 이들은 그 빛에 의해 의식 저편으로 나간다.
모든 그림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의식 너머의 것을 물질화해서 보여줘야 한다는 아이러니와 딜레마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있다. 김명숙은 그림을 매개로 해서 보는 이의 시선과 마음을 의식 너머로 부단히 이끌고 있다. 그녀의 그림은 그렇게 어디론가 이 세상이 아닌 곳으로 보는 이들을 침잠시킨다. 스스로를 매질하며 먼 대양을 건너는 물새들의 자학적인 몸짓을 연상시키는 그녀의 태도는 육체적인 혹사와 그 혹사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화면을 통해 처절한 상처로 드러난다. 작가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분명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그림은 어떤 깊음을 갈망한다. 미친 듯이 몸부림쳐보지만 인간의 육체로는 바닥에 닿지 못하고 가늠할 수 없는 모종의 깊은 세계를 표현하려는 잔인한 상처들이 그림을 과밀도로 채우고 있다.
작가는 그림으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깊음의 세계’를 얇은 종이의 표면 위에 새긴다. 그것은 사실 불가능한 욕망이다. 그러나 작가는 온 힘을 다해 화면에 부딪쳐본다. 육체와 감각으로 문질러진 화면은 피와 상처, 고독, 절망, 날선 신경들로 참담하다. 그리고 그 장엄한 절망을 보여준다. 그것이 정작 그림이 되었다. 한 가닥 선은 그대로 자신의 육체와 감성의 혈관들이 되어 얹혀있다. 이 촉각적인 선들, 선들의 촉각화는 다분히 여성만의 감각이다. 여성들은 대개 시각보다는 촉각을 통해 세계와 만나고 느끼고 인식한다. 그것은 눈에 의존하는 남성의 망막중심주의로는 근접하거나 체험할 수 없는 여성만의 감각이라고도 한다. 이 그림은 여성만의 육체와 촉각으로 빚어낸 생태계이자 자연과 세계의 초상이다.
촉각적인 선, 육체화 된 수많은 선들은 도저히 재현할 수 없는,그러나 끝없이 자신을 괴롭히고 한시도 떠나지 않는 어떤 세계와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 오로지 그어질 뿐이다. 대상의 재현이나 외형의 윤곽을 가까스로 연상시키는 지점에서 멈춰선 선들은 화면 전체를 빼곡히 덮치면서 그 모든 선 하나하나를 되살린다. 이 비현실적인 선들에 의해 우리들은 작가의 정신을 날것으로 만난다. 그리고 존재의 고유한 힘 또한 만난다.
작가의 그림은 구상과 추상의 이분법적 구도를 슬쩍 비껴남으로써 어떤 범주에도 안주하지 않고, 그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를 획득한다. 그 자유가 온 몸의 진액을 쏟아 부어 그어낸 이 깊고 어둑하고 음습한 그림 속의 한 줄기 빛, 부서지며 산란하는 햇살, 물살 위에 어른거리는 빛이 되어 세상을 뚫고 어디론가 나아간다. 그림 안에 없는 세계, 그림 밖의 세계를 빛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숲을 바라보거나 물을 볼 때면 김명숙의 그림을 떠올린다. 그 순간 내 앞의 풍경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좋은 그림은 이렇게 현실을 비현실과 만나게 해주는 동시에 사물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상투적이고 습관적인 시선과 감각을 예리하게 비틀어준다. 그리고 나를 일깨워준다.
피륙을 짜듯이 촘촘히 그림을 그려나가는 작가의 태도와 삶, 화폭 안에다 자신의 삶의 진액을 쏟아 붓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엄격하게 자신을 칭칭 동여 메는 이 자기 치유적이며 다분히 자폐적인 그림그리기란 얼마나 허망하고 상처받기 쉬운 가. 민감한 감수성과 집중력으로 자기 자신을 소진시켜가면서 회화를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와 존재의 의미, 정신의 정점에 육박하고자 하는 이 행위는 어느 면에서는 고립무원일 것이다.
그러나 삶이 다른 무엇에 의해 충만 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에 의하여 충만 될 수밖에 없다면, 제 몸을 매질하여 또 다른 연안을 꿈꾸는, 다소 무모해 보이는 이 행위 또한 작가에게는 운명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림 속으로 더 깊이 밀어 넣으면 넣을수록 분명 두려움 또한 깊어지겠지만,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그이의 운명인 것을.
박영택
“기독교에서는 창조주가 인간을 가장 공들여 빚었다고 하지만 제 생각엔 수목이야말로 창조주의 역작인 것 같아요. 바람이 제 작업실 뒷산 수목들을 휘감는 소리…이제 곧 녹색 촛불들이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타오르는지 알려하지 않고 다만 하늘을 향한, 다만 심연을 향한 갈망으로 충만해하는 수목들의 신전을 이루겠지요.” (작가 노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