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orks For Workers 전 (2010.9.08.-10.15)
내 작업실은 산막리에 있다
허물어져가는 빈 집들이 절반이고, 연로한 농부들이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아온 산의 막바지 마을이다.
여명이 밝아오는 여름 새벽, 새소리와 경운기 소리, 호미질 소리와 괭이질 소리가 나를 깨운다. 허리가 굽어 네발짐승처럼 걸어다니면서도 호미질이 밥이라고 풀이 않난 곳까지 호미질을 하시는 할머니의 밭은 우리집 안방보다 깨끗하다. 농사짓는 소리가 지나면 고물장수와 잡화장수, 깨진 유리창과 방충망을 고치는 아저씨의 트럭에서 마이크 소리가 간간히 들린다. 그 소리들은 외양간을 작업실로 쓰던 아랫마을에서부터 10년 넘게 들어오던 소리다. 그리고 이따금 비행훈련 소리가 들린다. 작업을 마주하고 듣는 비행기 소리는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보았던 닥터 한니발의 베이컨(Francis Bacon)적인 내 작업실을 지구로 귀환하지 못하고 우주를 떠도는 우주선처럼 느끼게 한다.
이곳에 이사 오기 전에는 소들이 이십년 넘게 기거한 외양간이 작업실이었다. 오년 넘게 비어 있던 곳이지만 나는 늘 소들의 체취를 느꼈다. 외양간 뒤편에는 그 동네에서 유명한 ‘농사도사’의 기름진 담배밭이 푸르르고, 알래스카 숫사슴 한 마리가 소나무꽃처럼 자라 오른 뿔을 이고 절망적인 몸짓으로 서성이는 우리가 있었다. 유월쯤이면 뿔 잘린 사슴이 뿔에 붕대를 감고 주저앉아 귀를 자른 채 파이프를 물고 있는 고흐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9년 넘게 나는 작은 들창 너머로 농사도사의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내 그림농사를 지었고, 알래스카 숫사슴과 절망도 함께 했다. 말이 아닌 몸으로 스스로가 되어가는 농부들과 나무들이 늘 내 곁에 있지만 나는 아직 그들의 묵묵함에서 멀리 있다.
산막리에서의 일들을 정리하며 “The Works for Workers”라고 이름 붙일까 한다.
사전에 의하면 work란 1.일,노동,공부,연구,과제,작업,노력 2.(생활을 위한)일(자리),직업 3.(종종~s)행위, 행동(deed),짓(act) 4.(pl)토목,공사,건조물 5.(예술)작품,저작을 의미한다고 되어있다.
15장의 미노타우로스(Minotauros) 연작은 상념의 미로를 탐색하는 소에 관한 공부였다. 10장의 Unknown workers 연작은 카프카의 동물들처럼 짐승이 되어서야 실존의 상태에 이르는, 자신의 한계를 work하며 실존의 도정에 있는 존재들에 관한 공부들이었다. Works for Hearts 연작은 그들의 상흔에 관한 공부들이 아니었을까.
돌이켜보니 지난 25년 동안의 작업들은 work(deed)에 관한 공부였던 것 같다.
시지프스(Sysiphus)에 관한 공부들, 나무의 나무되기에 관한 공부들, 자신의 심연에로의 하강을 수행하는 유영하는 사람들에 관한 공부들, 수련연작을 하고 있는 86살의 모네에 관한 공부들, “노동은 나의 강령이다”라고 말했던 밀레의 농부들에 관한 공부들. 밀레의 농부들은 내게 시지프스의 초상이었다. 그가 그린 키질하는 사람들은 곡식 낱알이 빛 알갱이가 되고, 키질이 무도가 되어갈 때 까지 키질을 계속한다.
The awful daring of a moment surrender
which an age of prudence can never retract.
By this and this only, we have exist.
-The Waste Land, T.S.Eliot
노련한 분별로도 삼갈 수 없는
한순간의 귀의, 그 경이로운 결행
이것으로 이것만으로 우리는 존재해 왔느니.
등에 맺힌 이슬방울이 입으로 굴러내리는 것을 받아먹기 위해 이른 새벽 나미브사막의 딱정벌레들은 어김없이 사구에 달려 올라가 물구나무를 선다. 딱정벌레들의 등에 맺힌 물방울이 이슬방울인지 땀방울인지 나는 모른다.
늘 한계와 회의, 무력감과 공허에 시달리지만 일(work)은 그런 잡초들을 잠시나마 뽑아준다.